'2회 우승' 염경엽 LG 감독 "1998년 축승회 구석 자리, 내 인생의 변곡점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LG 트윈스를 두 차례 통합우승으로 이끈 사령탑 염경엽 감독이 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2025.11.12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하남직 기자 = 염경엽(57) LG 트윈스 감독은 선수 시절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야구를 취미로 한다'는 뒷말을 들었다.
LG 부임 후 두 번째 통합우승의 여운이 아직 남은 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염 감독은 "내 대학, 프로 초창기 시절에 함께 뛰었던 선수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웃었다.
그는 "여행을 갈 때는 내가 중심이었다. 야구장 밖에서 만난 사람이 많기도 했고, 노는 걸 좋아할 때였다"며 "그런데 정작 야구장에서는 내가 중심이 아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야구 잘하는 선후배를 질투하지도 않았던 '선수 염경엽'의 인생을 바꾼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을 차지한 1998년이었다.
염 감독은 "축승회를 하는 데, 내 명패가 구석에 있었다. 나 때문에 아내, 딸의 자리까지 구석으로 밀렸다"며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내 위치에 따라, 내 가족의 자리까지 달라진다는 걸 알고서 절실함이 생겼다"고 떠올렸다.
LG 사령탑 최초로 2회 통합우승(2023, 2025년)을 차지하고, KBO리그 역대 사령탑 최고 대우(3년 최대 30억원)에 재계약한 '명장' 염경엽 감독이 꼽은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LG 트윈스를 두 차례 통합우승으로 이끈 사령탑 염경엽 감독이 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11.12 [email protected]
◇ "사기 당하고서야,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야구라는 걸 깨달았죠"
충격을 받았던 1998년 가울, 염 감독의 첫 선택은 '포기'였다.
그는 "현대 동료들은 물론이고, 광주일고 동기동창인 김기태, 후배인 이종범의 모습을 다시 봤다. 처음에는 그들처럼 열심히 할 자신이 없어서, 포기를 택했다"며 "캐나다로 이민가서 사업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국내에서 커피숍을 열려다가 사기도 당했다"고 고백했다.
이때 당한 사기도 새옹지마였다.
염 감독은 "똑똑하다고 생각한 내가 야구장 밖에서는 이렇게 사기나 당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야구였다"며 "그때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내에게 '나 야구장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게. 성공할 때까지 가정에 소홀해도 이해해줘. 언제가 꼭 우리 가족이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게 해줄게'라고 약속했다. 이후 내 삶은 아내,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시간이었다"라고 밝혔다.
염 감독의 아내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라"고 격려했다.
이후에도 염 감독이 좌절을 겪을 때마다, 그의 가족은 "기다릴 테니,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고 했다.
염 감독은 2023년 가을 "우승 감독, 염경엽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올해 가을에는 "두 번 우승한 감독, 염경엽입니다"라고 말한다.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LG 트윈스를 두 차례 통합우승으로 이끈 사령탑 염경엽 감독이 12일 서울 잠실야구장 감독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5.11.12 [email protected]
여전히 염 감독은 가족들에게 미안해하지만, 그의 아내와 딸은 팬들에게도 사랑받는 'LG의 가족'이 됐다.
염 감독은 1991년 태평양 돌핀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2000년 현대에서 은퇴할 때까지 10년 동안 프로 무대에 섰다.
하지만, 성적은 896경기, 타율 0.195(1천449타수 283안타), 5홈런, 110타점, 83도루로 초라했다.
은퇴 후 현대에서 프런트로 새 출발한 염 감독은 2007년 현대 수비 코치로 지도자 길에 들어섰다.
현대가 히어로즈에 인수된 뒤 LG 프런트로 일한 염 감독은 2010∼2011년에는 다시 LG 수비 코치로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하지만, 내홍에 휩싸여 2011시즌 뒤 팀을 떠났다.
2012년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1군 작전 코치로 이적한 그는 2013년 히어로즈 1군 지휘봉을 잡았다.
선수 시절 주전으로 뛴 시간이 짧고, 지도자 경력도 길지 않았던 염 감독의 사령탑 선임은 '파격'이었다.
염 감독은 2014년 넥센을 한국시리즈에 올려놓으며, '감독의 자격'을 증명했다.
LG 유니폼을 입은 뒤에는 무관의 한도 풀었다.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LG 트윈스를 두 차례 통합우승으로 이끈 사령탑 염경엽 감독이 12일 서울 잠실야구장 감독실에서 본인의 야구철학을 담은 자서전 '결국 너의 시간은 온다'에 사인하고 있다 . 2025.11.12 [email protected]
◇ "LG에서도 우승하지 못하면, 감독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늘 남편에게 용기를 주던 아내가, 염 감독에게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조심스럽게 말한 때가 있다.
2018년 SK 와이번스 단장으로 우승의 기쁨을 누린 염 감독은 2019년 SK 사령탑에 앉았다.
2019년 선두를 달리던 SK는 정규시즌 막판 두산 베어스에 정규시즌 1위를 빼앗기고 플레이오프(PO)에서 키움 히어로즈에 패하는 상처도 입었다.
2020년에는 하위권으로 떨어진 SK 성적에 고뇌하다가 6월 25일 두산과의 경기 중 쓰러졌고, 결국 팀을 떠났다.
염 감독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너무 넘쳤다. 김광현이 2019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앙헬 산체스가 2020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떠나 에이스 두 명이 사라졌는데도 '내 야구로 SK를 상위권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2020시즌 초반에 팀 성적이 뚝 떨어졌고,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잠을 설쳐가며 고민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사표를 던지고 물러나는 건, 야구인의 명예를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해 어떻게든 내가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다. 결국, 몸이 버티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쓰러지고서 한 달 동안 의사가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순간이었다"며 "그때 아내가 '우리 가족이 이제는 어딜 가도 대우받는다. 충분히 노력했고, 성과도 냈으니 이제 내려놓으시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2023시즌을 앞두고 LG가 1군 감독직을 제의했을 때도, 아내는 "1군 감독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이미 당신은 약속을 지켰다"고 염 감독을 만류했다.
염 감독은 또 한 번 아내에게 약속했다.
그는 아내에게 "LG는 내가 맡은 팀 중 가장 전력이 좋다. 이 팀에서도 우승하지 못하면 나는 감독의 자격이 없는 것"이라며 "LG에서도 우승하지 못하면 그땐 정말 더그아웃을 떠나겠다. 가족들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LG 트윈스를 통합우승으로 이끈 사령탑 염경엽 감독이 1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11.12 [email protected]
◇ "LG 전성기는 이제 시작…10넌 더 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게"
1990년 첫 우승을 차지한 LG는 4년 뒤인 1994년에 우승을 의미하는 두 번째 별을 달았다.
하지만, V3를 달성하기까지는 29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LG는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 연속 가을 무대를 밟지 못하는 설움을 겪었다.
염 감독이 부임한 2023년에 29년 만의 통합우승을 차지한 LG는 2년 만에 다시 정상에 올랐다.
7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최근 3년 사이 2번의 우승으로 '암흑기'를 환희로 덮었다.
LG 팬들은 이제 'LG 왕조 건설'을 꿈꾼다.
하지만, 동시에 해태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 등 왕조를 일궜던 팀이 오랜 기간 후유증을 겪은 과거도 떠올린다.
염 감독은 "LG의 전성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3년 동안 프런트와 현장이 '지속적인 강팀'을 만들고자 힘을 모았다. 나는 현장 책임자로, 내 후임자로 누가 오더라도 LG가 흔들리지 않도록 매뉴얼을 만들고자 애썼다"며 "3년 재계약을 하면서 LG를 더 견고하게 만들 시간을 더 얻었다. 지난 7년은 준비 과정이었다. 앞으로 10년 더 LG가 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게 노력할 것이다. 세밀한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LG 트윈스를 두 차례 통합우승으로 이끈 사령탑 염경엽 감독이 12일 서울 잠실야구장 감독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감독실 구석에 1인용 침대가 놓여 있다. 2025.11.12 [email protected]
◇ 20대의 염경엽에게…"너 고생 좀 할 거다"
게을렀던 20대의 '선수 염경엽'이 뜨겁게 얻은 교훈을 50대의 '성공한 지도자' 염 감독은 잊지 않고 있다.
그는 "내가 더 좋은 지도자가 되거나, 나보다 더 좋은 지도자가 LG에 나타나야 우리 구단이 더 탄탄해질 수 있다. 나는 더 노력할 거고, 우리 코치들에게 '분야 최고 전문가가 되고, 결국엔 나보다 좋은 감독이 돼라'라고 요구할 것"이라며 "절실하지 않았던 염경엽은 실패한 선수로 끝났지만, 바닥부터 다진 프런트·지도자 염경엽은 조금씩 결과를 내고 있다. 결과가 권위와 신뢰를 만들고, 더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걸 25년 동안 배웠다"고 했다.
염 감독에게 '20대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염 감독은 "너, 고생 좀 할 거다. 그런데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0대, 40대, 50대의 염경엽에게 미안해하라"며 "20대 때 게을렀던 탓에 지금은 조금 더 자고 싶을 때도 '경엽아, 정신 차려'라고 외치며 일어난다"고 씩 웃었다.
자신보다는 평탄한 길을 걷길 바라는 마음에 염 감독은 후배 지도자, 선수들에게도 "지금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며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너의 시간은 온다"고 말한다.